익산 토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익산 토성은 오금산 정상에서 남쪽 계곡을 둘러싸고 흙과 돌로 쌓은 산성으로, 오금산성 또는 보덕성이라고도 불린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 통일신라, 고려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보덕국 보덕왕이 익산에 자리 잡은 후 보덕국의 소재지였기에 보덕성으로 불렸다는 설이 있으며, 신라 신문왕 때 고구려 유민 실복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익산시의 지리 - 미륵산 (전북)
미륵산 (전북)은 금남정맥에서 분기되어 여러 산을 거쳐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 익산시의 지리 - 만경강
만경강은 전라북도 여러 지역을 거쳐 서해로 흘러드는 국가하천으로, 농업용수 공급과 지역 주민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수질 오염 및 생태계 파괴 문제가 남아 있으며, 금강 수계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 토성 (건축) - 안시성
안시성은 고구려의 요충지로 요하 유역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645년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고구려 멸망을 늦추는 데 기여했지만, 이후 당나라에 함락되었고 현대 문화 콘텐츠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 토성 (건축) - 풍납토성
풍납토성은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백제 초기 왕성으로 추정되는 한반도 최대 규모의 토성으로,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어 백제 시대 유물과 삼한 시대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복원 사업이 진행 중이다. - 익산시의 문화유산 - 익산 쌍릉
익산 쌍릉은 백제 무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익산시 왕궁면 소재의 백제 후기 왕릉으로, 대왕릉에서 발견된 유골 분석 결과가 무왕의 기록과 일부 일치하나, 무왕릉 확정 여부 및 소왕릉 주인공에 대한 추가 연구와 익산 천도설 관련 논쟁이 남아있다. - 익산시의 문화유산 - 천호동굴
천호동굴은 대한민국에 위치한 동굴로, 석회 광산 개발로 훼손되어 익산시에 의해 영구 폐쇄 및 통제되고 있으며, 시민들의 알 권리 침해 논란이 있다.
익산 토성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익산 토성 |
로마자 표기 | Iksan Earthen Fortification |
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92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주소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50-3 |
소유 | 사유 |
면적 | 200,430m2 |
시대 | 삼국시대, 통일신라(보덕국) |
위치 정보 |
2. 역사
익산 토성은 흙과 돌을 사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오금산성(五金山城) 또는 보덕성(報德城)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볼 때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으로 축성 시기가 추정된다.[1] 현재 남문 터와 수구 자리, 건물 터가 남아있다.[1] 성 부근에서는 청동 유물도 발견되어 성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2. 1. 축성 시기 및 배경
이 성은 오금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작은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흙과 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오금산성(五金山城) 또는 보덕성(報德城)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볼 때 축성 시기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1]보덕성이라는 이름은 보덕국(報德國)의 보덕왕이 670년 익산에 자리 잡은 뒤 684년까지 세운 보덕국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전해진다.[1]
삼국사기 김영윤 조에는 "신라 신문왕 때에 고구려의 남은 적(賊)인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그를 토벌할 것을 명하고 김영윤을 황금서당 보기감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2]
1980년대에 2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유물들은 거의 대부분 흙으로 만든 그릇 조각과 기와 조각으로서 백제, 통일신라, 고려 시대의 것들로 구분되나, 백제 말의 기와류와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발견된 유물들을 볼 때 이 성은 백제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2. 2. 보덕국과의 관계
보덕국 보덕왕이 670년 익산에 자리잡은 뒤 684년까지 보덕국을 세웠는데, 보덕성이 그 소재지였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1]삼국사기 김영윤 열전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때에 고구려의 남은 적(賊)인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그를 토벌할 것을 명하고 김영윤을 황금서당 보기감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2]
2. 3. 신라와의 갈등
삼국사기 김영윤 열전에 따르면, 신라 신문왕 때 고구려 유민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신문왕은 김영윤을 황금서당 보기감으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2]3. 발굴 조사 및 유물
1980년대에 2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흙으로 만든 그릇 조각과 기와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시대의 것들로 구분되나, 백제 말의 기와류와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1] 이 유물들을 통해 이 성은 백제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오랫동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성 부근에서 청동으로 만든 유물들이 발견되어 성의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4. 구조
오금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작은 계곡을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흙과 돌을 사용하여 쌓았으며, 오금산성(五金山城) 또는 보덕성(報德城)이라고도 한다.[1] 성을 쌓은 시기는 이곳에서 발견되는 유물들을 볼 때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남문이 있던 자리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도록 했던 수구자리, 그리고 건물이 있었던 자리가 남아있다.
5. 의의와 평가
보덕국의 보덕왕이 670년 익산에 자리 잡은 뒤 684년까지 세운 보덕국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보덕성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진다.[1]
삼국사기 김영윤 조에는 "신라 신문왕 때에 고구려의 남은 적(賊)인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그를 토벌할 것을 명하고 김영윤을 황금서당 보기감으로 삼았다."라는 기록이 있다.[2]
1980년대에 2차례 발굴조사를 통해 발견된 유물은 대부분 흙으로 만든 그릇 조각과 기와 조각으로서, 백제와 통일신라, 고려 시대의 것들로 구분되나, 백제 말의 기와류와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발견된 유물들을 볼 때 이 성은 백제가 크게 성장하던 시기에 만들어져 오랫동안 사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 부근에서 청동으로 만든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어 성의 중요성을 더해주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
[2]
웹사이트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